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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야마 세이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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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1926년 이바라키현에서 태어나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공학부를 졸업했다. 1955년 이바라키현 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196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자민당 내에서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여 자치대신, 통산대신, 법무대신, 자민당 간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2000년 사망했으며,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정부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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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야마 세이로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세이로쿠 카지야마 공식 초상화, 1996년 촬영
공식 초상, 1996년
이름가자야마 세이로쿠
원어 이름梶山 静六
로마자 표기Kajiyama Seiroku
출생일1926년 3월 27일
출생지히타치오타시, 일본
사망일2000년 6월 6일
사망 장소도쿄, 일본
학력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 학교니혼대학교
자녀가지야마 히로시
배우자가지야마 하루에
칭호 및 훈장정3위
[[파일: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40px]] 훈1등 욱일대수장
공학사 (니혼대학교, 1949년)
정치 경력
내각관방장관하시모토 류타로 내각
재임 기간1996년 1월 11일 ~ 1997년 9월 11일
전임자노사카 고켄
후임자무라오카 가네조
법무대신가이후 도시키 내각
재임 기간1990년 9월 13일 ~ 1990년 12월 29일
전임자하세가와 신
후임자사토 메구미
통상산업대신우노 소스케 내각
재임 기간1989년 6월 3일 ~ 1989년 8월 10일
전임자미쓰즈카 히로시
후임자마쓰나가 히카루
자치대신 및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다케시타 노보루 내각
재임 기간1987년 11월 6일 ~ 1988년 12월 27일
전임자하나시 노부유키
후임자사카노 시게노부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재임 기간1974년 11월 15일 ~ 1974년 12월 9일
전임자오무라 조지
후임자가이후 도시키
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 (1979–1996)
이바라키현 제4구 (1996–2000)
재임 기간1979년 10월 8일 ~ 2000년 6월 2일
전임자중선거구
후임자가지야마 히로시
중의원 의원이바라키현 제2구
재임 기간1969년 12월 27일 ~ 1976년 12월 9일
재임 기간1967년 2월 1일 ~ 1969년 7월 3일
재임 기간1958년 4월 ~ 1969년 11월
기타 직책
오키나와 담당 대신제2차 하시모토 내각
임기 시작일1996년 11월 7일
임기 종료일1997년 9월 11일
여성 문제 담당 대신제1차 하시모토 내각
임기 시작일1996년 1월 11일
임기 종료일1996년 11월 7일
자유민주당 간사장미야자와 기이치 총재
재임 기간1992년 12월 ~ 1993년 7월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총재
재임 기간1990년 ~ 1991년, 1992년
소속 정당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파벌사토 파벌 → 다나카 파벌 → 오부치 파벌

2. 생애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이바라키현 출신의 일본 정치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군 관련 학교를 거쳐 전후 니혼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었다. 1955년 이바라키현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196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9번 연속 당선되었다.[3] 자민당 내에서 다나카파를 거쳐 다케시타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다케시타파 칠봉행'''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다케시타 내각의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시작으로 우노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가이후 내각법무대신, 하시모토 내각의 내각관방장관 등 주요 각료직을 역임했으며, 당 간사장을 지내기도 했다.[3] 1998년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3] 2000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정계를 은퇴했으며, 같은 해 6월 6일 사망했다.[3][4][5]

2. 1. 초기 생애 및 정치 입문

이바라키현 출신으로, 1926년 3월 27일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바라키현립 오타 중학교, 육군 예과사관학교, 육군항공사관학교(59기)를 거쳤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 육군 항공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학교가 해산되자 니혼 대학교 공학부 토목공학과에 입학하여 1947년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가업인 석재업을 이어받아 운영했다.

1955년 이바라키현 의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7] 그러나 초선 의원 시절인 1958년 총선거 당시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며 매수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관련자였던 비서가 자신의 단독 범행임을 증언하면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8] 1966년에는 이바라키현의회 검은 안개 사건이 불거졌을 때, 체포된 현 의원이 카지야마로부터 현금을 받았다고 증언하여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해당 의원이 검찰 송치 후 증언을 번복하면서 카지야마는 기소되지 않았다.[9] 이후 현의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9]

카지야마는 1969년까지 이바라키현 의회에서 활동했으며, 같은 해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3]

2. 2. 중의원 의원 활동 및 자민당 내 역할

1955년부터 이바라키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었다. 당시 동기 당선자로는 와타누키 타미스케, 하야시 요시로, 시오자키 준, 모리 요시로, 무라타 케이지로, 마츠나가 히카루, 에토 타카미, 나카야마 마사테루, 하마다 코이치 등이 있었다. 이후 9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하며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입지를 다졌다.[3] 자민당 내에서는 사토 에이사쿠 파벌을 거쳐 다나카 가쿠에이 파벌에 속하게 되었다.

록히드 사건으로 다나카 가쿠에이가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을 때, 가지야마는 "야쿠자라도 두목이 출소할 때는 마중을 간다"고 말하며 가장 먼저 마중을 나갔다. 이러한 행동은 그의 '의리'를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 다음 선거에서 낙선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다나카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으나, 1985년에는 다나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를 차기 총재 후보로 지지하는 모임인 '창정회' 결성에 참여했다. 가네마루 신의 지시 아래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다나카 파벌 내에서 다케시타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다케시타 파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 과정에서 동기 당선자였던 오쿠다 케이와, 오자와, 하네다 츠토무, 와타나베 코조 및 2기 선배였던 고부치 케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함께 '''다케시타파 칠봉행'''으로 불리며, 1987년 다케시타 내각 출범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같은 해 11월, 다케시타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 처음 입각했다. 이후 1989년 우노 소스케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을, 1990년 카이후 도시키 내각에서는 법무대신을 역임했다.[3]

그러나 1990년 신주쿠에서 발생한 매춘부 체포 사건과 관련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신주쿠 지역을 언급하며 흑인들을 "매춘부"라고 지칭하고, "이곳은 미국의 일부 지역처럼 흑인들이 몰려와 백인들이 떠나게 만드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국무부는 이를 "극도로 인종차별적"이라고 규탄하며 어떤 형태의 인종 집단에 대한 편견도 용납될 수 없으며 미국 국민에게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가지야마는 며칠 후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1]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자민당 사무총장을 맡았으나,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3] 이후 1996년 1월,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임명되어 정계 전면에 복귀했다. 그는 금융 위기 당시 정부 지원을 통한 연착륙 대신 부실한 대형 은행의 파산을 용인하는 '하드랜딩' 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당시 젊은 정치인이었던 스가 요시히데 등의 지지를 받았다.[2] 관방장관 퇴임 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3]

2. 3. 각료 및 당 요직 역임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유력한 지지자였던 가지야마는 여러 내각에서 주요 각료직을 역임했다.[3] 1987년 다케시타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이후 우노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1989년-1990년), 가이후 내각에서는 법무대신(1990년-1992년)을 지냈다.[3]

1992년, 1992년 도쿄 사가와 급편 사건으로 다케시타파(게이세이카이) 회장 가네마루 신이 실각하자 파벌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회장 대행[10]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에 반발한 가지야마 등은 오부치 게이조를 후계 회장으로 추대하며, 오자와가 지지하는 하타 쓰토무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 갈등은 '''일육 전쟁'''으로 불린다. 결국 참의원을 장악한 오부치 측이 승리하여 오부치가 후계 회장이 되었으나, 오자와와 하타 등은 파벌 내 파벌인 개혁 포럼 21을 결성하며 게이세이카이는 분열되었다.[11]

같은 해 가지야마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오자와 계는 이에 반발하여 공식적으로 파벌을 이탈해 하타파를 결성했다. 가지야마가 소극적이었던 정치개혁 관련 4법안이 부결되자, 하타파 의원 다수와 일부 다른 파 의원들이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하타파와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의 그룹이 자민당을 탈당하는 사태로 이어졌다.[11] 불신임 결의안 가결에 따른 1993년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 가지야마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간사장직에서 물러났으며[3], 호소카와 내각 수립의 주역이 된 라이벌 오자와와는 대조적으로 '자민당 하야의 A급 전범'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1994년 6월 자사사 연립 정권 수립으로 자민당이 여당에 복귀할 때까지 정치적 자숙기를 보내야 했다.[11]

1995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하시모토 류타로의 당선을 도왔고, 1996년 1월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관방장관에 임명되어 정계 전면에 복귀했다.[3][11] 관방장관 재임 중, 특히 1996년 총선거 이후에는 과거 격렬하게 대립했던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과의 연립을 모색하는 이른바 '''보보연합 구상'''을 당내 카메이 시즈카 등과 함께 추진했다. 이는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의 연립을 중시하는 간사장 가토 고이치, 노나카 히로무 등 '자사사파'와의 극심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하시모토 총리와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가 '자사사파'를 지지하면서 보보연합 구상은 좌절되었고, 가지야마는 1997년 9월 관방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다케시타 및 노나카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11]

이후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오부치 게이조에게 도전했으나 패배했다.[3] 금융 위기 당시에는 정부 지원을 통한 구제 금융 대신 부실한 대형 은행의 정리를 주장하는 '하드랜딩'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주장을 지지했던 인물 중에는 훗날 아베 신조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하게 되는 스가 요시히데도 있었다.[2]

2. 4.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및 사망

1998년 7월, 제18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패배하자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책임을 지고 사퇴를 표명했다. 후임 총재를 선출하기 위해 열린 199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다케시타노나카의 지지를 받은 오부치 게이조가 출마를 선언하자, 가지야마는 이에 맞서 오부치가 속한 파벌을 이탈하여 출마를 결심했다. 사토 신지스가 요시히데도 가지야마를 지지하며 함께 파벌을 나왔다. 가지야마가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무파벌 상태로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것은 1972년 총재 선거 입후보 제도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지야마는 시마무라 요시노부를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아소 다로를 선거대책 책임자로 임명하고 선거 운동에 나섰다. 그는 고노 그룹(다이유카이), 미츠카 히로시 파벌 내 카메이 시즈카 그룹, 그리고 과거 와타나베 미치오 파벌에 속했던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의 경계를 넘어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선거 과정에서 가지야마는 "부실채권 처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등 경제의 경착륙(하드랜딩)을 감수하더라도 구조 개혁을 우선해야 한다는 노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 적극적인 재정 정책과 금융 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츠카 파벌의 지지를 받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후생대신의 득표수를 웃돌았고(오부치와 가지야마·고이즈미 연합의 표 차이는 40표에 불과했다), 당초 최하위로 예상되었던 무파벌 후보로서 상당한 선전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1월 30일, 가지야마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후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결국 사고 3개월 뒤인 4월 25일에 정계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협심증 치료를 받던 중, 같은 해 6월 6일 오후 3시 45분에 폐쇄성 황달로 도쿄 국립암센터 중앙병원에서 향년 74세로 사망했다.[3][4][5] 그의 사망 직후인 6월 25일에 치러진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장남인 가지야마 히로시가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이바라키현 제4구에서 후계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이후 내각 각료를 역임했다.

3. 정치 성향 및 정책

이바라키현 의회 의원을 거쳐 1969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9번의 선거에서 승리했다.[3]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주요 인물로, 다케시타 내각의 내무대신, 우노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카이후 내각의 법무대신을 지냈으며, 자민당 간사장까지 역임했다.[3]

현 의원 시절에는 온화한 성품으로 "불의 육상(六三)"이라 불렸으나, 1976년 총선 낙선 후 정치적으로 변모하여 국정 복귀 후에는 강경한 태도로 "무투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간사장 시절, 오자와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당 직원들을 불신하여 사무실에 병풍(衝立)을 설치하고 직원을 미행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4][15] 오키시마 사다오에 따르면 간사장을 사임할 때 직원들에게 "너희들은 오자와 쪽으로 가면 된다!!"라고 쏘아붙이고 퇴실했다고 한다.[14][15] 하마다 코이치는 가지야마의 독단적 행동이 자민당을 망쳤다고 비판하면서도, 다나카 가쿠에이를 끝까지 지킨 의리나 정치력은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했다.

험악한 인상과 강경한 정치 수법, 정국에서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무투파"라 불렸지만, "일본인의 피로 이룩한 헌법 9조의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해외 파병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등 비둘기파적인 면모도 있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추모 시설 건립 필요성을 일찍부터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금융 위기 당시 부실 은행을 정리하는 '하드랜딩' 노선을 주장했으며, 이는 정부 지원을 통한 부양책과는 다른 입장이었다. 당시 그의 주장을 지지했던 인물 중에는 훗날 아베 신조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지낸 스가 요시히데도 있었다.[2] 스가 요시히데는 가지야마를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며, 관방장관 취임 시 그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20] 가지야마는 아소 다로에게도 기대를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7][18]

대외 정책에서는 구 다나카파 내에서는 드물게 친타이완 성향을 보였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의 관방장관 시절, 미일 방위 협력 지침 개정과 관련하여 유사시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규정하는 '주변 사태'의 대상에 타이완 해협도 포함된다고 발언하여 중국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16]

1990년에는 신주쿠에서 흑인들을 "매춘부"라고 지칭하며 "미국처럼 흑인 유입으로 백인들이 떠나는 일이 벌어진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발언은 국내외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고, 미국 국무부는 "극도로 인종차별적"이라며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가지야마는 며칠 후 사과했다.[1]

가네마루 신은 다케시타 파벌 내 인물들을 평가하며 "평온한 하시모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으며,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다나카 마키코는 후보들을 "평범한 사람(오부치), 군인(가지야마), 변인(고이즈미)의 싸움"이라고 묘사했는데, '군인'이라는 표현은 그의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3. 1.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1988년 3월, 가지야마는 국가공안위원장으로서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 공산당 소속 하시모토 아츠시(橋本敦) 의원은 1978년 여름에 후쿠이현, 니가타현, 가고시마현 등에서 발생한 젊은 남녀의 연쇄 실종 사건과 도야마현 다카오카시의 유괴 미수 사건, 그리고 타구치 야에코(북한 공작원으로 알려진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 관련 의혹에 대해 질의했다.

이에 가지야마는 "쇼와 53년(1978년) 이래의 일련의 커플 실종 사건은 아마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한 납치의 의혹이 매우 짙다"고 답변하며, "사태의 중대성을 고려하여 앞으로도 진상 규명을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답변이었다.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우노 소스케 역시 "우리의 주권이 침해되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도적인 문제"라며 강한 분노를 표했고, 법무대신 하야시다 유키오(林田悠紀夫)와 경찰청 경비국장 시로우치 야스미츠(城内康光)도 북한에 의한 납치 의혹을 인정하며 수사가 진행 중임을 밝혔다.

1997년,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건이 새롭게 드러났을 당시 가지야마는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의 내각관방장관이었다. 같은 해 5월 1일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자민당 기카와 요시오(吉川芳男) 의원의 질문에 대해, 가지야마는 1988년의 판단, 즉 "북한에 의한 납치의 의혹이 매우 짙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다만 북한과 국교가 없어 사실 확인에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했다.

이어서 그는 당시 논의되던 대북 식량 지원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은 이 납치 사건 등 인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그 의혹을 북한에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며, 북한에서 유입되는 마약 문제 등과 함께 거론했다. 이를 통해 가지야마는 북한의 인권 문제와 불법 행위 의혹을 부각시키며,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사실상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4. 평가

현의회 의원 시절에는 온화한 성품으로 “'''불의 육상(六三)'''”이라 불렸다. 그러나 1976년 총선거에서 낙선하고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변모하여, 국정 복귀 후에는 주변을 긴장시키는 “무투파”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간사장 시절에는 16전쟁에서 의심이 너무 커진 결과 자민당 직원들이 오자와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직원을 신뢰하지 않고 간사장실에 衝立(일본식 병풍)을 설치하거나 직원을 미행했다고 오키시마 사다오와 하마다 코이치로부터 통렬하게 비판받았다. 오키시마에 따르면 간사장을 사임할 때 직원들에게 “'''너희들은 오자와 쪽으로 가면 된다!!'''”라고 쏘아붙이고 퇴실했다고 한다.[14][15]

하마다 코이치는 저서 『일본을 망친 아홉 명의 정치가』에서 가지야마에 대해 “독단적인 행동으로 자유민주당을 망쳤다”고 비판했지만, 한편으로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목숨을 걸고 지켰다”, “다나카가 체포되었을 때 버리고, 영향력이 변하지 않는다고 보자마자 붙는 무리들보다는 낫고, 제대로 원칙을 지켰다”, “정치력에는 평가할 만한 점이 많다”라며 일정 부분 평가하고 있다.

험악한 인상과 정치 수법, 정국에서의 과격한 발언 등으로 “무투파”라 불렸지만, “일본인의 피로 이룩한 헌법 9조의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해외에서의 무력 사용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등 비둘기파적인 면도 있었다. 생전에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새로운 추모 시설 건설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주장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구 다나카파에서는 드물게 친타이완파에 속했고, 1997년 여름, 한반도 위기를 배경으로 하시모토 내각의 관방장관 시절에는, 일미 방위 협력을 위한 지침(가이드라인) 재검토에 관해 “주변 사태(주변 유사)의 대상에 타이완 해협도 포함된다”고 발언[16]하여 중국 측의 반발을 불렀다.

가지야마는 자신의 의지를 계승할 미래의 지도자 후보로 당시 고노 그룹에 있던 아소 다로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고 한다.[17][18]

중선거구제 하에서는 조반 탄광이나 히타치 제작소노동조합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일본사회당의 이시노 히사오·조우치 토요지 등과 격전을 벌이는 한편, 츠카하라 토시로·츠카하라 슌페이 부자와도 같은 보수표를 놓고 경쟁했다. 1994년, 중의원 선거에 소선거구제가 도입되었을 때, 츠카하라 슌페이는 “이제 가지야마 선생님과 싸울 필요가 없어서 안심이다”라며 제도 도입을 환영했다.

다케시타파 전성기에는 당시 회장이었던 가네마루 신으로부터 “'''평온한 하시모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불렸다. 또한, 199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에게 “'''평범한 사람(오부치), 군인(가지야마), 변인(고이즈미)의 싸움'''”이라고 평가받았다. 이 “군인”이라는 표현은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 경력에 유래한다.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 전에,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다나카 히데유키에게 가지야마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가지야마는 책상 위에 경제 전문 서적을 4, 5권 쌓아놓고 “지금 공부해도 늦다. 나는 대장성에 속았다. 전에는 미안했다.(소비세 증세를 확인한) 각의 때 당신 말이 맞았다”라고 다나카에게 사과했다. 그때 다나카는 “가지야마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다른 교류 방법이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9]

스가 요시히데는 정치의 스승으로 가지야마를 언급하고 있으며, 제2차 아베 내각 관방 장관 취임 시에도 가지야마의 묘소를 참배하고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20]

법무대신 재임 시의 대신 비서관은 스미다 유코(전 검찰관, 현재 변호사)가 여성 최초의 비서관으로 취임했다.

5. 기타


  • 저서: 『파괴와 창조: 일본 부흥을 위한 제언』(破壊と創造 日本再興への提言일본어) (2000년, 고단샤)
  • 소속 단체: 신도정치연맹 국회의원 간담회

참조

[1] 뉴스 Racial Slur by Japanese Aide Rekindles Anger https://www.nytimes.[...] 2020-08-29
[2] 웹사이트 Who is Chief Cabinet Secretary Yoshihide Suga? https://asia.nikkei.[...] 2020-09-01
[3] 웹사이트 LDP's Kajiyama dies at 74 https://www.japantim[...] 2020-08-28
[4] 웹사이트 Japan's Ex Cabinet Secretary Dies https://apnews.com/9[...] 2020-08-29
[5] 웹사이트 史上初の大調査 著名人100人が最後に頼った病院 あなたの病院選びは間違っていませんか https://gendai.media[...] 現代ビジネス 2020-01-15
[6] 서적 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7] 일반
[8] 일반
[9] 웹사이트 歴代正副議長名簿 https://www.pref.iba[...] 2021-04-28
[10] 일반
[11] 문헌 離党のタイミングは武村らが先
[12] 뉴스 私の履歴書 日本経済新聞 2020-12-23
[13] 뉴스 99年秋の叙勲 勲三等以上と在外邦人、外国人、在日外国人の受章者一覧 読売新聞 1999-11-03
[14] 서적 自民党幹事長室の30年 中央公論新社 2002
[15] 서적 日本をダメにした九人の政治家 講談社 1993-12
[16] 웹사이트 「軍人」の宿題への回答は 台湾有事、提起から四半世紀 ニュース・エディター 丸谷浩史 https://www.nikkei.c[...] 2021-05-20
[17] 뉴스 麻生氏、きょう県連で演説 県内党員に支援訴え 茨城新聞 2007-09-19
[18] 간행물 没後3年 『梶山静六ブーム』永田町を駆ける 月刊現代 2003-10
[19] 서적 平成史への証言 政治はなぜ劣化したか
[20] 웹사이트 菅官房長官「政治の力で危機突破」=故梶山長官の墓前に誓う http://jp.wsj.com/la[...]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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